다드림 청년 공동체 Q.T
270일차 완료(충분히, 또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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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9-27 07:40본문
매일드림 270일차 완료(조영찬 목사)
"충분히, 또 분명히"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번”은 ‘충분함’을 “두 번”은 ‘반복과 강조’를 뜻한다... 하나님은 멀리서 한 번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강조하셨고 마침내 아들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한 번 온전히 들려주셨다. 날마다 곁에서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석의 전쟁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순종이 아닐까?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욥 33:14)
1. 충분히, 또 분명히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긴 논쟁을 듣다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답이라고 못을 박는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번”은 ‘충분함’을 “두 번”은 ‘반복과 강조’를 뜻한다. 곧 하나님은 충분히, 또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문제는 인간이 그 뜻을 듣지 못하는 데 있다. 말씀은 늘 흘러나오지만, 우리의 귀가 닫혀 있는 것이다.
2. 인간의 완고함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논리를 모두 비판한다. 고난의 원인을 단순히 보응론으로 환원할 수도 없고, 욥이 주장하듯 하나님의 침묵으로 결론낼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인간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소통 수단은 넓고 풍부하다. 문제는 우리의 완고한 해석 틀과 폐쇄된 감각이다. 결국, 깨닫지 못함은 하나님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둔함 때문이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3. 말씀에 귀를 열 때가 왔으니
엘리후의 말은 결국 초대다. 욥과 친구들처럼 스스로 답을 끌어내려는 대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욥기는 종종 신약적 복음으로 이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멀리서 한 번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강조하셨고 마침내 아들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한 번 온전히 들려주셨다. 날마다 곁에서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석의 전쟁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순종이 아닐까?
“주님, 말씀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데 제 귀가 닫혀 있음을 고백합니다.
복과 고난의 이유를 따지기보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들려주신 그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붙잡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충분히, 또 분명히"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번”은 ‘충분함’을 “두 번”은 ‘반복과 강조’를 뜻한다... 하나님은 멀리서 한 번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강조하셨고 마침내 아들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한 번 온전히 들려주셨다. 날마다 곁에서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석의 전쟁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순종이 아닐까?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욥 33:14)
1. 충분히, 또 분명히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긴 논쟁을 듣다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답이라고 못을 박는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번”은 ‘충분함’을 “두 번”은 ‘반복과 강조’를 뜻한다. 곧 하나님은 충분히, 또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문제는 인간이 그 뜻을 듣지 못하는 데 있다. 말씀은 늘 흘러나오지만, 우리의 귀가 닫혀 있는 것이다.
2. 인간의 완고함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논리를 모두 비판한다. 고난의 원인을 단순히 보응론으로 환원할 수도 없고, 욥이 주장하듯 하나님의 침묵으로 결론낼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인간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소통 수단은 넓고 풍부하다. 문제는 우리의 완고한 해석 틀과 폐쇄된 감각이다. 결국, 깨닫지 못함은 하나님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둔함 때문이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3. 말씀에 귀를 열 때가 왔으니
엘리후의 말은 결국 초대다. 욥과 친구들처럼 스스로 답을 끌어내려는 대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욥기는 종종 신약적 복음으로 이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멀리서 한 번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강조하셨고 마침내 아들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한 번 온전히 들려주셨다. 날마다 곁에서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석의 전쟁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순종이 아닐까?
“주님, 말씀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데 제 귀가 닫혀 있음을 고백합니다.
복과 고난의 이유를 따지기보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들려주신 그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붙잡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